2018년 음주 상태 뇌경색 환자의 진단 오류와 관련해 응급의학과 전공의 2명에게 업무상 과실치상 유죄(금고형의 집행유예)를 선고한 대전지법 형사 1심 판결에 대해 대한응급의학의사회와 서울특별시의사회가 잇따라 규탄 성명을 발표하며 의료계의 반발이 제기되고 있다.
◆“만취 환자 뇌경색 진단 못 했다고 형사처벌”
2018년 6월 충남 천안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에 술에 취해 복통과 구토, 의식장애 등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이송됐다.
당시 응급의학과 전공의 2명은 뇌 CT 검사를 시행해 출혈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환자를 귀가시켰다.
이후 환자는 뇌경색 악화로 신체 일부가 마비되는 영구적 장애를 입었다.
검찰은 신경학적 검사를 시행하지 않고 뇌 CT 검사만 하는 등 진료를 소홀히 했다는 혐의로 전공의 2명을 기소했고, 대전지법은 “환자에게 업무상 과실로 영구적 장애라는 중대한 결과가 초래돼 엄중한 책임을 지울 필요가 있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응급의학의사회 “현장 무시한 판결…방어진료 전환 선언”
대한응급의학의사회(회장 이형민)는 성명서를 통해 “이번 판결은 응급의료 현장에 대한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것으로, 단순한 법적 판단이 아니라 우리나라 응급의료 시스템에 내린 사망선고나 다름없다”고 규탄했다.
이어 “만취 상태의 음주 환자가 올바른 신경학적 진찰과 협조가 가능하겠는가”, “음주로 구토하는 환자가 MRI 촬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라며 반문하고, “이 모든 질문의 대답은 ‘아니오’”라며, “응급실은 음주 후 구토하는 환자에 대해 CT 촬영을 통해 출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귀가시키는 역할을 하는 곳이지, 매우 드문 희귀질환을 MRI 같은 정밀검사를 통해 확진하는 곳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매일 응급실에서 일하는 우리에겐 회피 가능하지도, 예측 가능하지도 않은 일을 업무상 과실치상으로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응급의료기관의 절반 이상이 24시간 MRI가 안 되는 곳이다. 앞으로 음주환자는 대부분의 응급실에서 수용을 거절할 것이며, 무조건 MRI까지 찍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서울시의사회 “사법의학의 폭력…응급의료 유지 불가”
서울특별시의사회(회장 황규석)도 성명서를 통해 “대한응급의학의사회의 성명 취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사법의학의 폭력 아래 응급의료 현장은 이미 한계에 도달했으며, 이번 판결은 그 붕괴를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응급실은 모든 질환을 완벽하게 확진하는 공간이 아니라 제한된 시간과 인력,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가장 위급한 상황을 우선 배제하며 환자의 생명을 지켜내는 곳이다. 음주, 구토, 의식저하, 신경학적 증상이 혼재된 환자에서 초기 진단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의료현장의 상식이다. 결과론적 판단만으로 당시 의료진의 형사책임을 묻는다면, 앞으로 어느 의사가 응급실에서 적극적 진료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특히 “이미 젊은 의사들은 응급의학과 지원을 기피하고 있으며, 중증응급환자를 책임지는 현장은 빠르게 붕괴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사법부가 의료현실을 외면한 채 과도한 형사책임을 부과한다면 대한민국 응급의료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미국은 선의의 진료에 형사처벌 안 해…한국만 유일”
대한응급의학의사회는 미국의 응급의료법(EMTALA)을 근거로 판결의 부당성도 역설했다.
미국 연방법원은 ‘적절한 검사’를 동일한 증상의 다른 환자에게 시행하는 검사와 동일한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며, 설령 객관적 표준을 일부 벗어났더라도 주관적으로 선의를 가지고 진료했다면 형사처벌을 하지 않는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의사회는 “미국의 응급실 진단 정확도는 70% 미만”이라며 “진단오류와 합병증을 형사처벌하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만이 유일하다”고 꼬집었다.
그러나 대전지법은 환자를 위해 선의를 가지고 일반적인 방법대로 검사까지 시행한 전공의들에게 민사배상에 이어 형사책임까지 부과했다.
이형민 회장은 “도대체 응급실에서 어떤 주의를 얼마나 더 기울여야 주의의무 위반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의료사고 특례법 무력화 지적…“보여주기식 제도 중단하라”
양 단체 모두 이번 판결이 최근 통과된 의료사고 특례법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이형민 회장은 “이 판결로 이번에 통과된 의료사고 특례법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 사례”라고 규정했고, 의사회 성명서에서도 “아무리 중대 과실이 아니라고 해도,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으면 결국 이렇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시의사회 역시 “이번 판결은 정부와 국회가 추진 중인 의료사고특례법 논의가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라며 “이름뿐인 특례와 제한적 면책 조항만으로는 필수의료 붕괴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정부와 국회는 보여주기식 제도 논의를 중단하고, 필수의료 및 응급의료 종사자들이 최소한의 사법 안전망 속에서 진료할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제도적 보호장치를 조속히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응급의학의사회, 6개항 선언…2심 무죄 총력 지원
대한응급의학의사회는 이번 판결이 현장에 초래할 치명적 결과에 대해 경고하며 6개 항의 선언(▲모든 응급실의 방어진료 전환 선언 및 보건복지부에 음주를 정당한 응급실 수용거부사유로 추가할 것을 요구 ▲MRI 즉시 시행이 불가능한 경우 음주환자 포함 어지럼증 환자의 응급실 수용 불가 ▲모든 질환 감별 완료 시까지 귀가 불가 및 상급병원 과밀화에 대한 법원 책임 ▲추가 검사·입원치료 비용에 대한 심평원의 전액 지급 요구 ▲의료사고 특례법의 무의미함 지적 ▲해당 전공의들의 무죄 입증을 위한 학술적 증거 수집, 법률 지원, 탄원서 및 서명운동 등 모든 가용수단 총동원)을 발표했다.
이형민 회장은 “현장을 무시한 이 같은 판결을 강력히 규탄하며,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만약 법원에서 응급실에서 진단하지 못한 전공의를 형사처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나라에 더 이상 응급의료는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메디컬월드뉴스 김영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