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의료연구소가 23일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알츠하이머 치료제 레켐비(성분명 lecanemab)를 허가하는 과정에서 한국인 대상 통계적 유의성이 확보되지 않았음에도 가교임상시험을 면제하고 중앙약사심의위원회 심의도 거치지 않은 채 졸속 허가했다”며, 정부에 식약처 감사를 요구했다.
◆졸속 허가 과정에 과학적 원칙 훼손 논란
바른의료연구소(이하 연구소)는 이날 발표한 입장문에서 “식약처의 레켐비 허가 과정이 과학적 원칙과 행정 절차를 중대하게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연구소는 “이번 허가는 단순한 판단 오류가 아니라 국민 건강권을 담보로 제약사의 이해관계와 행정 편의에 손을 들어준 위험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에자이/바이오젠의 레켐비는 지난 2024년 5월 식약처 허가를 받아 11월 말 비급여로 출시됐으며, 현재 다수 의료기관에서 처방되고 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전진숙 의원(더불어민주당)이 확보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 국내 처방 건수가 1만 건을 넘어섰다.
◆한국인 하위그룹 분석, 통계적 유의성 확보 못해
연구소가 지적한 핵심 문제는 가교임상시험 면제 과정이다.
레켐비 3상 임상시험에는 전체 참가자 1,795명 중 아시아인 303명, 한국인 130명이 포함됐다.
전체군에서 18개월 후 CDR-SB(임상치매평가척도) 기준 평균 치료효과 차이가 -0.451(27.1%)로 통계적으로 매우 유의미했다(p=0.00005).
하지만 한국인 대상 하위분석에서는 치료 18개월 후 CDR-SB 점수 변화가 위약군 대비 -0.55(25.2%) 감소해 전체군과 수치상 유사했지만, 통계적으로는 유의하지 않았다(p=0.16682).
연구소에 따르면 2024년 11월 학술대회에서 공개된 이 결과는 한국인에서의 효과가 명확히 입증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식약처 의약품평가부의 ‘가교자료 평가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민족 간 요인 차이로 안전성·유효성이 영향받을 수 있어 가교자료 검토가 필수다.
기존 가교자료로 민족적 요인 차이가 없음이 입증되면 가교시험이 면제되지만, 외국 임상자료의 국내 적용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새로운 가교시험을 실시해야 한다.
◆“효과 경향” 이유로 가교시험 면제는 억지 해석
연구소는 “식약처가 한국인 하위분석 평가에서 통계적 의미(p값)를 제시하지 않았다”며 “전체군 27.1%와 한국인 25.2%가 수치상 유사해 보여도 통계적 의미는 다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식약처는 단지 “효과 경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교임상시험을 면제했다는 것이다.
연구소는 “가교자료만으로는 레켐비의 유효성이 민족적 요인에 차이가 없음을 입증했다고 볼 수 없어 가교시험 면제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근거중심 의학의 기본 원칙을 위반하고 규제기관이 지켜야 할 최소한의 과학 기준조차 포기한 잘못된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중앙약사심의위원회 심의도 생략
더 심각한 문제로 연구소는 식약처가 중앙약사심의위원회(중앙약심위) 심의조차 거치지 않고 레켐비를 허가했다는 점도 지적했다.
중앙약심위는 약사법에 근거해 의약품의 안전성·유효성 평가, 부작용 피해 구제 등을 심의하는 자문 기구다.
식약처는 의약품 품목 허가 시 중앙약심위 회의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자문 절차를 생략했다는 것이다.
연구소는 “다른 신약 허가 과정에서는 일반적으로 거치는 중앙약심위를 알츠하이머 치매 치료제인 레켐비가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납득되지 않는다”며 “의도적인 절차 회피인지, 비정상적 행정 관행인지 명확히 규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작용 보고 급증, 국민 안전 우려
처방량 급증과 함께 이상사례 보고 건수도 가파르게 증가했다.
항아밀로이드 항체 치료제에서 흔히 나타나는 ‘아밀로이드 관련 영상 이상(ARIA)’도 다수 보고됐다.
연구소는 “국내 환자들이 한국인을 대상으로 임상적 효능이 검증되지 않은 채 사망을 포함한 부작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고 우려했다.
◆식약처 감사 및 허가 과정 전면 공개 요구
연구소는 식약처에 레켐비 허가 과정의 경위와 구체적 내용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가교자료 분석 원자료 및 통계 검증 근거, 허가 과정 관련 내부 문서 전부, ‘효과 경향’이라는 모호한 판단의 과학적 근거를 공개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독립적인 외부 전문가로부터 검증을 받고 레켐비 허가를 재검토하며, 허가 과정에서 절차를 생략한 책임자를 규명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에 대해서는 레켐비 허가 과정에서의 특혜나 편법 여부 확인을 위해 식약처 감사를 실시하고, 고위험 신약 허가 시 의무적 전문가 심의체계 적용과 이해충돌 방지 장치 강화 등 행정 투명성 확보 방안을 법제화할 것을 촉구했다.
연구소는 “근거가 불충분한 약을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행정은 비윤리적일 뿐 아니라 잔혹하다”며 “이번 사안을 끝까지 추적해 국회, 감사기관, 언론, 의료전문가, 시민사회와 함께 식약처의 부실하고 부당한 조처를 낱낱이 규명하고 반드시 바로잡겠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한국에자이 담당자는 “식약처가 이미 설명을 한 바 있고, 특별한 입장은 없다”고 밝혔다.
[메디컬월드뉴스 김영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