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대한약사회의 386개 의약품 성분 ‘운전주의 약물’ 4단계 분류·배포에 대해 “공공기관의 공식 기준과 법률적 제도 정비가 부재한 상황에서 이뤄진 비과학적 조치”라며 공식 우려를 표명했다.
이어 도로교통 안전과 환자 건강권을 동시에 보호할 3대 정책 대안을 촉구했다.
◆“초기 부작용만으로 운전금지 선고, 현대 의학 원칙 훼손”
대한신경정신의학회(이하 대신정)는 “특정 약물의 단편적인 초기 부작용만을 근거로 오랜 기간 안정적으로 약을 복용해 온 환자들에게까지 운전금지를 선고하는 것은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중추신경계 약물의 경우 복용 초기(급성기)와 적응이 완료된 유지기의 부작용 발현 양상이 근본적으로 다르며, 주치의의 판단 없이 성분만으로 운전 가능 여부를 일률적으로 단정할 수 없다”며, “이번 금지약물 분류에 인슐린, 당뇨병 치료제, 항히스타민제 등 다양한 필수 의약품이 포함돼 있어 정신과 영역에 국한되지 않는 공통의 의료 문제”라고 강조했다.
◆치료 중단이 부르는 ‘안전의 역설’
대신정이 가장 심각하게 경고한 것은 치료 중단의 역설적 위험이다.
대신정은 “무분별한 금지 목록 배포와 처벌 위주의 단속 예고가 초래하는 가장 큰 위험은, 생업을 위해 운전해야 하는 환자들이 사회적 낙인과 처벌 공포로 필요한 약물 복용을 스스로 중단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밝혔다.
대신정은 국제적 대규모 역학 연구들이 적절한 정신과 약물 치료가 질환 증상(충동성, 인지 저하 등)을 조절해 교통사고 위험을 오히려 획기적으로 낮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영국·프랑스·호주·캐나다·독일 등 선진국 어디에서도 특정 직능단체가 처방약을 독자적으로 '운전 금지'로 분류·배포한 사례가 없으며, 이들 국가는 모두 전 진료과 전문의·기초의학 전문가·국가 규제기관이 공동 개발한 다학제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신질환자를 ‘도로 위 시한폭탄’으로 매도하는 구조적 폭력”
대신정은 이번 분류가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고착화하고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비판했다.
질환의 중증도나 개별 의학적 상태를 배제한 채 일방적 가이드라인을 유포하는 것은 “정신질환자와 중추신경계 약물 복용 환자들을 도로 위의 시한폭탄으로 매도하는 구조적 폭력”이라고 규정했다.
대신정은 한국이 우울증 치료 성과와 관련된 자살률 OECD 1위로 심각한 정신건강 위기에 있는 상황에서 일률적 ‘운전 금지’ 낙인이 ▲이미 낮은 치료율의 추가 하락 ▲미치료 정신질환에 의한 교통사고 위험 증가 ▲운전이 필수적인 환자들의 생활권 침해 ▲처방 의사에 대한 과도한 법적 책임 전가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도로교통 안전·환자 건강권 동시 보호 위한 3대 정책 제언
대신정은 향정신성 치료약물 복용이 곧 운전 금지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명확한 정정을 요구하는 한편, 사법기관 및 정부 당국에 3대 정책 대안을 촉구했다.
▲‘국가 표준 의학 평가 가이드라인’ 제정
영국 운전면허청(DVLA)이나 일본 후생노동성(MHLW) 사례처럼 담당 전문의의 개별 임상 평가를 최우선 법적 기준으로 삼는 ‘국가 표준 의학 평가 가이드라인’의 제정이다.
특정 직능단체가 아닌 다학제적 협력에 기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도로교통법 내 ‘의학적 방어(Medical Defence)’ 조항 신설
범죄 목적의 약물 오남용이 아닌 주치의의 의학적 관리 아래 합법적으로 치료받고 있고 실질적 주행 능력에 지장이 없는 환자에 대해 단속 및 형사 처벌을 면제하는 인권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전문의 처방권 보장과 대국민 인식 개선 캠페인 진행
진료 현장의 의사들이 방어 진료 없이 최선의 의학적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는 정신질환자는 도로 위에서 안전하다”는 과학적 메시지를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정은 “마약 및 오남용 약물 운전의 엄단이라는 도로교통법 개정 취지에 공감하며 도로 안전을 위한 사회적 노력에 동참할 것”이라면서도 “이 과정에서 환자들이 치료 기회를 박탈당하고 사회에서 배제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학문적 근거에 기반한 합리적 규정 마련에 책임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메디컬월드뉴스 김영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