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회사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패소하면서, 흡연으로 인한 질병 치료비를 누가 부담해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다.
서울고등법원 6-1재판부는 지난 1월 15일 공단이 KT&G,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 등 담배회사 3곳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에서 공단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번 소송은 흡연으로 인한 폐암 등 중증 질환 치료비가 건강보험 재정을 통해 국민 전체의 부담으로 전가되는 구조에 대해 담배회사의 책임을 묻기 위해 제기된 공익소송이었다.
◆법원 “1960~70년대에도 흡연 유해성 인지”…현실과 괴리 지적
법원은 이번 판결에서 소송 대상자들이 1960~70년대 흡연을 시작할 당시 이미 흡연의 유해성과 중독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또한 흡연 외 다른 위험요인(생활습관, 유전, 환경 등)을 이유로 흡연과 질병 간 인과관계를 최종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법원은 “소송 대상자들이 장기간 고도 흡연자이며, 흡연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폐암·후두암에 걸렸다는 점이 인과관계 판단의 중요한 고려 요소”라고 명시해 흡연과 질병 간 인과관계를 전면 부인한 1심보다는 일정 부분 진일보한 판단을 내렸다는 평가다.
건보공단은 법원의 판단이 당시 의학적·사회적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흡연의 건강 문제 기준점을 제시하는 미국 공중보건국 보고서조차 1988년에야 담배 흡연이 니코틴 중독에 의한 것임을 처음 인정했다는 점을 들어, 일반 국민이 1960~70년대에 흡연의 유해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선택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대한금연학회 “의과학 부정하는 판결”…6가지 쟁점 제기
대한금연학회(회장 김열)는 1월 26일 성명을 통해 이번 판결에 깊은 유감을 표하며 6가지 쟁점을 제기했다.
김열(국립암센터, 금연지원센터장) 회장은 “흡연과 폐암·후두암 사이 역학적 상관관계만으로 개별 환자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법원 판단은 역학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는 논리”라고 비판했다.
세계보건기구(WHO), 국제암연구소(IARC), 미국 보건총감 보고서 등에서 수십 년 전부터 흡연의 발암성을 ‘확정적 인과관계’로 선언해 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다른 위험요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특정 위험요인의 인과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며 “이 논리대로라면 어떠한 환경·산업 유해물질도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학회는 담배회사의 중독성 은폐·축소 행위도 문제 삼았다.
담배회사가 니코틴 중독성 강화 설계, 흡입 효율을 높이기 위한 첨가물 조절, ‘순한’ ‘라이트’ 등 허위·오인 마케팅을 해온 사실이 이미 국제 소송과 문서 공개를 통해 확인됐다는 것이다.
◆해외에선 담배사 책임 인정…“같은 담배, 다른 판단”
건보공단은 해외 주요 국가에서 흡연 피해에 대한 담배회사의 직접적 책임이 인정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미국은 1998년 주정부와 담배회사 간 대규모 합의(MSA)를 통해 흡연 피해 책임을 제도화했고, 캐나다 역시 공공보험 재정을 근거로 한 담배소송에서 담배회사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과 전국적 합의가 이뤄졌다.
공단은 “필립모리스와 BAT가 해외소송에서 거액의 배상 책임을 인정받았음에도, 같은 ‘말보로’ ‘던힐’을 흡연한 우리 국민들에게는 아무런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 것은 일반 상식으로도 납득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러한 사법적 판단을 바탕으로 몰디브는 특정 연도 이후 출생자에 대해 흡연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 ‘흡연 원천 차단 정책’을 시행 중이며, 영국도 차세대 흡연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한 담배 규제 법제화를 추진중이다.

◆건보공단 “상고 검토…국민건강 보호 책임 다할 것”
대한금연학회는 대법원에 ▲흡연과 폐암·후두암의 인과관계는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 ▲다수 인구집단의 건강 피해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법치국가의 마땅한 요구라는 점 ▲공중보건 영역에서 요구되는 인과관계 판단 기준은 형사재판 기준과 달라야 한다는 점 ▲담배로 인한 질병 발생과 사회적 손실에 대해 담배회사도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확인해 줄 것을 촉구했다.
건보공단은 판결의 취지와 판단 이유를 면밀히 분석해 법률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적극적으로 상고를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한 WHO 담배규제기본협약(FCTC) 당사국으로서 담배로 인한 건강 피해를 줄이고 국민건강을 보호할 국제적 책무를 다하며, 건강보험 보험자로서 흡연 피해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한금연학회는 “이번 판결이 확정되면 담배뿐 아니라 향후 모든 유해 산업에 대해 ‘과학이 아무리 명확해도 책임은 묻지 않겠다’는 신호를 주게 될 것”이라며 “질병 비용의 사회화, 이윤의 사유화를 정당화하는 판결로 남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메디컬월드뉴스 김영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