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건강보험공단이 담배회사 3곳을 상대로 낸 533억원 손해배상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양측이 흡연의 중독성과 담배 제조사의 책임을 놓고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서울고법 민사6-1부는 지난 22일 건강보험공단이 KT&G와 한국필립모리스, BAT코리아를 상대로 낸 12차 변론을 진행했다.
정기석(호흡기내과 전문의) 공단 이사장이 직접 출석해 담배회사의 직접 책임을 강조하며 법정 공방이 치열하게 전개됐다.
◆ “담배가 폐암 발생에 98% 기여한다”
정기석 이사장은 “2025년도에 와서도 담배의 중독성을 얘기하는 것 자체에 비애를 느낀다”며 “담배회사들이 수십 년에 걸쳐 흡연의 유해성과 중독성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소비자를 기만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담배회사가 흡연중독 피해를 '개인의 선택'으로 돌리려는 주장은 국민을 두 번 기만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공단은 최근 건강검진 수검자 약 14만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를 제시했다.
건보공단 건강보험연구원과 연세대 보건대학원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30년·20갑년 이상 흡연자의 소세포폐암 발병 위험이 비흡연자보다 54.49배 높았다.
암 발생 기여 위험도 분석에서도 ‘30년 이상, 20갑년 이상’ 흡연자의 소세포폐암 발생에 흡연이 기여하는 정도가 98.2%를 차지했으며, 유전 요인의 영향은 극히 적었다.
정 이사장은 “우리 국민 100명이 폐암으로 사망했을 때 그중 85명은 담배 때문이라는 결과도 있다”며, “수술을 앞두고도 병원 복도에서 몰래 담배 피우는 모습을 수없이 봤다. 자기 몸이 하나밖에 없는데도 피우는 건 중독성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 담배회사 “흡연은 개인적 선택”
담배회사 측은 개인의 흡연 행위는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담배회사 측 변호인은 “흡연은 개인적 선택이었고, 흡연을 선택하신 분들은 여전히 중단할 수도 있다”며 “금연 성공률이 낮다는 통계가 금연의 자유의지 상실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고 반박했다.
공단의 원고 적격성도 문제 삼았다.
다른 변호인은 “원고는 2014년 이 소송을 제기하면서 가입자를 대위한 것이 아니라 공단이 보험급여를 지급했다는 이유로 직접 소송을 청구했다. 보험급여 지출은 공단이 보험자로서 이미 인수한 위험으로, 담배의 결함이 아닌 보험 관계에 따른 지출”이라고 주장했다.
◆ 소비자단체 “담배회사 책임 물어야”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소속 12개 단체(한국YWCA연합회, 소비자교육중앙회, 한국여성소비자연합 등)는 이날 공동 성명을 통해 건보공단의 소송을 적극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성명에서 “담배회사들이 담배의 유해성을 은폐하고 기만해 온 형태를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며, “담배회사는 담배의 제조, 수입, 판매 당시 유해성을 숨기고 소비자들의 건강상 위험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어 “중독성이 강한 담배를 생산하면서 흡연을 소비자의 자유의지로 표현하는 기만적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 10년 이상 이어진 소송
건보공단은 2014년 4월 담배회사 3곳을 상대로 533억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30년·20갑년 이상 흡연한 뒤 폐암, 후두암을 진단받은 환자 3,465명에게 공단이 지급한 급여비다.
2020년 1심 재판부는 “대상자들이 흡연에 노출된 시기와 정도, 생활 습관, 가족력 등 흡연 외의 다른 위험인자가 없다는 사실이 추가로 증명돼야 한다”며 공단 패소를 판결했다.
공단은 흡연과 암 발생의 인과관계를 입증하기 위해 대한폐암학회와 호흡기내과 전문의 의견서, 담배 중독에 대해 한국중독정신의학회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의견서, 대한금연학회에서 실시한 담배중독 감정서 등 22건의 추가 증거자료를 제출했다.
담배중독 감정은 소송대상 생존자 중 13명을 대상으로 실시됐으며, 기억력이 양호한 12명 전원이 중등도 이상의 담배 중독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소송은 담배의 중독성과 유해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 변화와 함께 담배회사의 책임 범위를 가늠하는 중요한 사법적 판단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의 건강권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놓고 벌어진 이 법정 다툼의 결과가 향후 유사 소송과 담배 정책에 미칠 파급효과가 주목받고 있다.
[메디컬월드뉴스 김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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