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 마니 반메 훔! 나는 미륵이다.”
혼란스러웠던 신라 말, 미륵불을 자처한 왕이 있었다.
버림받은 고아소년에서 왕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평등사회를 꿈꾼 개혁군주부터 미치광이 폭군까지!
극과 극의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 그는 바로 궁예다.
■ 그는 개혁군주였다
2000년 방영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궁예는 극악무도하고 독단적인 폭군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왕이 곧 부처임을 주장하며 한 사람의 강력한 군주가 이끄는 나라를 원했던 독재자. 그런데 그가 한때는 무너져가는 신라를 대신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타고난 신분이 아닌 개개인의 능력으로 대우 받는 나라. 그것이 궁예의 나라, 후고구려의 이상이었다.
당시 기득권층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평등 사회’를 꿈꾼 지도자 궁예의 면모를 살펴보고, <만물각>에서 그가 타파고자 했던 신라의 차별적 신분제약 ‘골품제’에 대해 실제 KBS 드라마에 사용된 의상을 살펴보며 이야기한다.
■ 미치광이 폭군, 처자식마저 죽이다
궁예의 잔혹한 폭정이 극에 달하던 어느 날, 왕비 강씨가 두 아들과 함께 국문장에 끌려왔다.
죄목은 간통! 궁예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신통력인 미륵 관심법을 사용해 알게 되었다고 주장했을 뿐 제대로 된 증거조차 없었다.
결국 잔인한 방식으로 왕비와 두 아들은 한 날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궁예의 패륜! 궁예는 왜 처자식을 죽였던 것일까?
■ 좋은 놈 vs 나쁜 놈? 왕건과 궁예!
송악군의 호족으로 대부호인 아버지를 둔 왕건과, 부모에게 버림받고 밑바닥 삶을 경험한 궁예는 인생의 출발부터 달랐다.
집안, 성격, 통치 방식 등 모든 것이 대비되었던 난세의 두 영웅!
왕건은 한때는 후고구려의 세력 확장에 날개를 달아준 신하였으나 결국 궁예를 저버리고 반란을 일으켜 고려를 건국한다.
역사에 성군으로 기록된 왕건과, 잔혹한 폭군으로 남은 궁예. 엇갈린 두 사람의 운명! 역사가 기억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과연 진실일까?
■ 궁예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궁예는 왕이 된지 18년 만에 죽음을 맞았다. 세상이 바뀌었고 민심은 그에게 등을 돌렸다. 궁예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궁예가 왕건에게 성군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하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왕건을 피해 달아난 궁예가 보리 이삭을 훔쳐 먹다가 분노한 백성들에게 맞아 초라하게 죽어갔다고 전한다.
한때는 백성들을 위한 이상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궁예. 그는 마지막까지도 한 나라의 군주였을까, 아니면 초라한 도망자였을까?
한때 모두가 평등한 나라를 꿈꾸었던 이상주의자 궁예, 오는 15일 일요일 밤 10시 30분 KBS 1TV에서 방송되는 <역사저널 그날> ‘기획시리즈 드라마 속 역사 인물’을 통해 궁예의 그날들을 되짚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