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31일(토)에 방송되는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에서는 ‘리포터계의 송해’를 꿈꾸는 박슬기의 이야기를 담았다.
■ 박슬기 ‘리포터계의 송해’를 꿈꾸다
■ 박슬기 ‘리포터계의 송해’를 꿈꾸다
[섹션TV 연예통신]으로 리포터 계에 입문한 박슬기. 어느 덧 데뷔 12년차다. 그리고 지난 해, 데뷔 11주년을 축하받기라도 하듯 연말 방송연예대상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처음 리포터 생활을 시작했을 때에는 여러 고충도 많았다. 인파에 밀리고 경호원에게 제지를 당하는 일은 일쑤, 잠깐의 인터뷰를 위해 10시간 넘게 대기한 적도 많다.
매니저도, 코디도 없어 그녀의 작은 소형차는 늘 이동 분장실이 된다. 스타들 앞에서 실수하면 안 된다는 부담감에, 혈변과 탈수에 시달려 몸무게가 38킬로그램까지 빠지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무던한 노력들이 모여 지금의 ‘리포터 박슬기’를 만들었다. 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다 보니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할 기회가 없었다는 그녀. 이제 우리는 박슬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
“내가 돋보이기 보다는, 내가 주인공이라기보다는 같이 인터뷰 해주시는 스타 여러분들이 주인공이 되어야 하니까 나를 무조건 낮춰야하고…. 저의 많은 것들을 (시청자분들께) 다 보여 드릴 수는 없죠.”-박슬기 INT 중-
■ 화려한 데뷔부터 생계형 리포터가 되기까지
박슬기라는 원석이 세상에 드러난 건 지난 2004년 ‘MBC 팔도 모창 가수왕’ 선발대회서였다. 온몸을 부르르 떨며 박정현의 ‘편지할게요’를 부르던 강원도 출신 여고생은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대상을 거머쥐었다.
박슬기라는 원석이 세상에 드러난 건 지난 2004년 ‘MBC 팔도 모창 가수왕’ 선발대회서였다. 온몸을 부르르 떨며 박정현의 ‘편지할게요’를 부르던 강원도 출신 여고생은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대상을 거머쥐었다.
이후 인기 시트콤과 영화에 출연하며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인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점차 찾는 곳이 줄어들었고, 결국 그녀는 생계를 위해 ‘스타’ 대신 ‘스타를 취재하는 리포터’가 되는 길을 택했다.
이제 박슬기라는 방송인 앞에는 ‘리포터’라는 단어가 꼭 따라 붙는다. 치열한 방송 현장에서 긴 시간을 보낸 만큼 ‘리포터 박슬기’의 입지는 단단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방송인으로서 항상 긴장감을 놓지 않는다.
방송이 없는 날에는 문화센터에서 중국어 수업을 듣고, 틈틈이 연극이나 뮤지컬 무대의 문도 두드리고 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기회에 늘 대비하는 것이 그녀가 장수하는 비결이다.
“일이 끊길까봐 제일 고민이죠.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방송 쪽이기 때문에 (일이 끊기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에요. 뭐든지 주어진 건 열심히 하려는 성격이기 때문에 생계형 (리포터라는) 이미지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지는 않아요.”-박슬기 INT 중-
■ 강원도 여고생이 ‘억척 가장’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MBC 팔도 모창 가수왕’에서 대상을 받으며 데뷔 한 이후로, 박슬기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왔다. 그녀가 가장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어린 시절 폐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네 식구의 빠듯한 생활비, 어린 두 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 20대의 박슬기는 얼굴에 주근깨를 그리고, 더벅머리 가발을 썼다. 지치고 놓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아버지의 유언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제작진 앞에 어렵게 꺼내놓은 아버지의 낡은 유언장에는 두 동생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 열다섯 살 딸에게 큰 짐을 지어줘서 미안한 아버지의 마음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데뷔 12년차, 지금도 수입의 대부분을 자신이 아닌 가족들에게 쓰고, 작은 돈도 허투루 쓰지 않는 연예계 대표 짠순이 박슬기. 가족을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온 그녀의 이야기를 [사람이 좋다]에서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