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은 채 평년과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김도환 교수가 지난 1월 27일 열린 의료정책연구원-한국의학교육학회 공동 세미나에서 던진 화두다.
의대정원 증원과 전공의 집단행동이 촉발한 의정사태가 의학교육에 남긴 상처는 깊다.
하지만 그 상처를 직시하고 성찰하는 작업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학교육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원칙의 상실: “임기응변으로만 이루어졌다”
한 교수는 “교육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교육이 지켜야 할 기준을 흐리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교수는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학사일정이 수시로 변경되는 것 자체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거치며, 그 변화가 원칙 없이 임기응변으로만 이루어졌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의학교육 관계자는 “의과대학은 무조건적인 학생 품어주기를 통해 행위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우리 사회의 기초적인 질서조차 가르치지 못하게 되었다”며, “어떤 형태의 투쟁이든 스스로 선택한 행동에는 일정한 책임과 감수해야 할 불이익이 따른다는 점 역시 함께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원칙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교육의 도구화: “협상 카드처럼 취급되었다”
한 교수는 “의학교육이 집단 이익을 위한 협상 카드처럼 취급되었다”고 토로했다.
“학생들이 협상에 참여하며 이러한 방식의 논의 구조를 반복적으로 학습한 것은 분명한 문제”라는 것이다.
의학교육 지원 직원은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가려진 정보와 결정자인 척하는 KAMC(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였다”고 지적했다.
교육이 본질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교육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무력감과 소진은 극대화됐다.
◆2026년 ‘트리플링’ 공포: “대량 유급의 악몽”
가장 큰 우려는 2026년이다.
2024학번과 2025학번이 동시에 본과에 진입하면서 ‘더블링(doubling)’을 경험한 대학들이, 2026년에는 2026학번까지 더해져 ‘트리플링(tripling)’ 상황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질 저하 불가피
한 학생은 설문조사에서 “본과 공부가 심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선배들을 통해서 잘 알고 있는데 여기에 24, 25학번이라는 전례 없는 배타적인 상황에 놓인 학번이라는 이유로 대량 유급이라는 심적으로 극한의 스트레스를 견디며 하루하루 죽고 싶다는 심정으로 본과 4년을 살고 싶지는 않다”고 호소했다.
또 다른 학생은 “인턴 재수를 하면 다음 년도로 넘어갈 인원도 많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러면 다음 학번이 피해를 입는 등 악순환이 계속될까 두렵다”고 말했다.
충북의대 채희복 교수가 제시한 교원 확보 계획을 보면, 정원 300명 기준으로 2026년에는 교수 1인당 학생 수가 3.98명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실제 재직 전임교수는 166명에 불과해, 계획대로 교원을 확보한다 해도 교육의 질 저하는 불가피하다.
▲타협과 불균형: “양질의 교육은 포기했다”
한 교수는 “그 전에는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더 잘 배울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면, 지금은 잘 배우고 말고를 떠나 주어진 자원으로 ‘수업 운영이 가능한가’만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교수는 “팀 구성을 5명에서 10명으로 두 배로 늘려도, 양질의 토론이나 활동은 어려웠고, 피드백도 구체적이지 못했다. 학생들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른 수업들도 수업, 준비, 평가가 넘쳐났기 때문”이라고 토로했다.
▲불균형 문제
불균형 문제도 지적됐다.
한 교수는 “의과대학생들은 복학 이후에도 이수 학기 축소, 국시 응시 기회 추가 부여에 대한 요청 등 어느 규정에도 없는 단서 조항들을 계속 만들어가며 요구했으며,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며 “최종 결정 시에는 합리적인 모습들을 보이시던 분들도 집단의 의견에 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침묵: “말하지 않은 채 평년과 다르지 않은 일상”
한 교수는 “그들을 응원하고, 그들의 저항을 지지하면서도, 그 방법적인 부분에 대한 많은 문제점들을 지적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내가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들릴 리도 만무했다”고 말했다.
김도환 교수는 “지금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은 채 평년과 다르지 않은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런 침묵이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자각과 성찰: “관계가 다시 시작되는 최소한의 조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교육 현장에는 희망의 싹이 남아있다.
한 교수는 “이 경험은 의학교육이 얼마나 많은 관계와 신뢰 위에 서 있는지, 그리고 위기 속에서 의학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수와 직원의 역할이 얼마나 정서적으로도 큰 부담을 동반하는지를 더 분명히 인식하게 만든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교수는 “수업이 이뤄지는 교실을 넘어, 교수와 학생의 관계, 교육기관인 대학의 태도 그리고 표현, 대학들을 총괄하는 기관, 정부 등 학생을 대하는 태도가 곧 교육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저는 ‘교육’이 제도를 유지하거나 학사를 정상화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관계가 다시 시작되는 최소한의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다시, 다음: “조금 더 다른 선택을”
김도환 교수는 “교육은 형식적으로 유지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누적된 정서적·신체적 소진은 충분히 기록되거나 공유되지 못했으며, 이는 향후 유사한 위기 상황에서 의학교육의 지속 가능성을 논의하는 데 있어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각 직역에 있어 본인의 자리를 다시 한 번 성찰하고 다음 번에는 조금 더 다른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며 조심스러운 기대를 표현했다.
김 교수는 발표를 마치며 이렇게 말했다.
“Every way of seeing is also a way of not seeing(모든 보는 방식은 동시에 보지 못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케네스 버크의 이 말처럼, 우리가 놓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스태프 없는 무대, 공저자 없는 연구, 수비수 없는 시합” 김 교수가 제시한 이 비유는 의학교육 현장에서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들을 상징한다.
“불완전한 시선, 빌려온 눈, 비로소 보이는 전체” 이제는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의학교육의 미래는 단순히 정원을 늘리거나 시설을 확충하는 것만으로 보장되지 않는다.
관계의 회복, 원칙의 재확립, 그리고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그것만이 진정한 의학교육의 정상화로 가는 길이다.
[메디컬월드뉴스 김영신 기자]